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 가락동-방이동 고분군 (문단 편집) ==== 가락동 3호분 ==== 주요한 쟁점이 되는 석실 중의 하나. 신라토기와 함께 백제 고분에서 널리 쓰이던 방두형관정이 출토된 고분이다. 백제석실을 신라인이 재사용하였다는 '재사용설'의 주요 근거로 제시되는 고분이다. 분포도에 보이듯이 다른 고분과 떨어져 혼자서 산지에 입지하는거 같지만, 봉토가 없고 지하에 현실을 시설하는 백제 석실분 특성상 당시의 날림 조사방법과 수준으로는 주변 고분을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으로, 실제로는 연기 송원리 고분군처럼 주변에 많은 석실분, 석곽분이 고분군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가락동 3호분도 조사단이 완전히 놓친 고분으로, 가락동 4,5,6호분 발굴 작업 중, 벽석을 조사하던 인부가 "어? 이거 내 텃밭에도 있는데?" 해서 조사단이 현장을 답사해서 트렌치 조사를 해서야 찾은 고분이다(...). 고분자체는 현실 가로세로 3m 이상의 대형의 현실에 우편재 연도가 달린 대형석실분으로, 다른 가락동, 방이동 석실분과 다르게 얇은 판석을 쌓아 올렸으며, 현실이 부푸는 듯한 형상의 동장설계도 관찰된다. 또한 천정부 가구 방식도 다른 고분과 다르게 사변석을 이용하여 면을 다듬으면서 궁륭상 천정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각설하고 이만한 크기의 석실분은 한성기 백제에서는 연기 송원리 KM-016호분, 화성 왕림리 석실분 정도이며, 웅진기에는 송산리 1,2,3,4호분이 비슷한 크기이다. 신라 고분으로 볼 경우에는 최고 위계 고분인 경주 장산 토우총, 황성동 석실분, 전헌강왕릉 석실분보다도 훨씬 큰 대형이다. 이 고분 축조주체가 백제이든, 신라이든 최고위계 석실분이라는 소리. 밑에 축조주체 논쟁 부분에서 자세히 하술하겠지만, 대부분의 논자가 이 고분만큼은 백제 고분이라고 공히 인정한다. 다른 가락동-방이동 고분과 떨어져 위치한 입지, 석촌동 고분군과의 인접성, 그리고 지하식 현실의 동장형 현실구조, 사변석의 사용과 방두형 관정의 출토가 그 주요 근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